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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획특집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1>앙리 드 뤼박(상)

교부와 신앙 유산에 대한 관심 제고로 공의회 개막에 공헌

2014.01.19발행 [1249호]

교부와 신앙 유산에 대한 관심 제고로 공의회 개막에 공헌

교회로부터 가장 많은 의혹과 비난을 받았던 신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교회와 신학에 쇄신을 불러일으켰던 신학자, 그가 바로 프랑스 예수회의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1896~1991) 신부다. 그는 명실공히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아 추기경에 서임됐다.

▲ 앙리 드 뤼박(오른쪽)과 장 다니엘루 신부. 두 사람은 '그리스도교 원천' 시리즈를 발간했다.

 생애와 새로운 신학의 개척

 95세까지 장수했던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1896년 프랑스 북부 캉브레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란 드 뤼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는 예수회 고등학교를 나와 리용가톨릭대학 법학과에서 1년을 공부한 뒤 17세가 되던 해인 1913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당시 프랑스 예수회는 1905년 정부의 종교분리 정책으로 영국으로 추방됐기 때문에 드 뤼박은 영국에서 청원기와 수련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젊은 청년수사 드 뤼박은 1915년 군에 입대했지만 2년 뒤 베르댕 전투에서 오른쪽 귀 뒤쪽에 총상을 입고 의병제대했다. 이때의 부상으로 그는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군에서 제대한 드 뤼박은 곧장 영국에 있는 예수회 수련소에 다시 들어가 1919년부터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캔터베리에선 문학을(1919~1920), 저지섬에선 철학을(1920~1923), 그리고 헤이스팅스의 오레 플레이스에서는 신학을 공부했다. 수련기 마지막은 프랑스 제2의 수도 리용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리용 시내 푸르비에르에 위치한 수련소에서 신학을 공부했다(1928~1929).

 수련기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팡세'라는 학술모임 성격의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지도신부는 드 뤼박의 스승으로 리용가톨릭대학 교수이자 후에 자신의 과목을 드 뤼박에게 넘겨준 알베르 발랑상 신부였다. 여러 가지 신학 문제를 고민하고 공부하는 이 학술모임에서 드 뤼박은 동료와 후배들을 이끌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했다. 6년 후배인 스위스 신학자 한스 우르 폰 발타사르에게 교부들에 관해 더 연구할 것을 권고한 것도 이때이다.

 앙리 드 뤼박 신부를 일명 리용-푸르비에르 신학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가 리용의 푸르비에르에서 수련기의 마지막을 보냈고, 1927년 사제품을 받고 난 뒤 곧바로 리용가톨릭대학에서 정년퇴임 때까지 교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용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갈리아 지방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도 교부인 이레네오 성인이 주교로 지냈던 곳이며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당시까지도 예수회가 운영하는 신학대는 파리가 아니라 리용에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에 위치한 파리가톨릭대에 견줄만한 훌륭한 철학자와 신학자가 리용가톨릭대에 포진해 있었고, 유럽에서 유학 온 학생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동양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를 비롯한 정양모 신부와 박상래 신부, 그리고 변규용 교수가 리용가톨릭대에서 공부했다.

 앙리 드 뤼박은 사제품을 받은 뒤 2년 동안 남은 신학공부를 마치고, 1929년 그의 나이 33세에 리용가톨릭대 신학교수로 임명됐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교수로 임명되는 바람에 박사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비록 박사는 아니었지만 교수로서 능력이 탁월해 처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1938년 새로운 방법론으로 그리스도교 교의가 내포하는 공동체적 특성을 밝힌 「가톨릭시즘」을 출간하며 신학계의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그가 대학에서 가르친 과목은 오늘날 '기초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과목이었다. 1930년에는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과목을 신설, 타종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특히 동양의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동양 종교와 신비사상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친구요 교구 신부였던 쥴 몽샤냉(1895~1957)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동료 신학자 가스통 페사르와 함께 독일 나치즘과 전체주의에 항거, 정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투쟁했다. 곧 반유다이즘적 이데올로기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잡지 「그리스도인 증거」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참된 의미를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

 원천으로 돌아가기

 교부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으로 연구에 집중했던 드 뤼박은 1941년 예수회 동료 장 다니엘루 신부(초기 교회사 전공, 훗날 드 뤼박 신부와 함께 추기경으로 서임)와 '그리스도교 원천'(Sources Chre'tien nes, SC)이라는 유명한 시리즈를 창간했다. 책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교 원천을 이루는 교부들의 문헌 총서를 말한다.

 이 총서는 초기 교부들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신앙 유산인 교부들의 저서를 발굴하고 이를 원본뿐 아니라 비판적 해설을 덧붙여 프랑스 현대어로 번역, 출판한 것이다. 1942년 장 다니엘루 신부가 번역하고 해설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모세의 생애」를 제1권으로 낸 이래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564권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교부학자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 연구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고 있다. 이 총서는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것이다. 앙리 드 뤼박과 장 다니엘루 등을 위시해 프랑스 신학자들의 이와 같은 '교부들에게 돌아가기'를 통한 '원천으로 돌아가기' 운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드 뤼박은 이미 1910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신학잡지 '종교학 연구'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 잡지는 당시의 새로운 입문학(入門學), 특히 역사학과 종교학의 발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해석했던 잡지다. 이 잡지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에 기초하지 않고 역사학적이고 실증적이며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된 논문을 주로 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도미니코회가 주축이 되어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토대를 둔 철학과 신학 사상)의 보급에 집중했던 「토미스트 잡지」와는 노선이 다른 것이다.
 
 오해와 시련기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드 뤼박에게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오랜 연구 끝에 1946년 발간한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가 로마의 도미니코회와 교회 당국으로부터 갖은 비난과 오해를 받게 되면서부터다. 이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재해석했던 신-스콜라 학자들의 은총론이 토마스를 오히려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줬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는 순간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불림을 받았고 인간에게는 자연인으로서 자연적 목적과 초자연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초자연적 목적 곧 하느님을 닮는 것, 초자연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것임을 교부들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 전통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사실 신-스콜라 학자들은 인간이 본래 자연적인 '순수본성'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상정했는데, 순수본성이란 은총도 죄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순수본성을 잃게 됐고,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 은총을 인간에게 베풀어 구원으로 이끄셨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순수본성을 상정한 다음 부패된 인간 본성에 초자연적 은총이 다가와 인간이 결국 초자연적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설명한 이유는 그만큼 하느님 은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인간은 창조된 순간부터 초자연적인 목적(은총)을 향해 창조되었다'고 말한 앙리 드 뤼박의 주장은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을 축소시키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로써 드 뤼박은 토미즘을 유일한 신학으로 알던 당시 대부분의 신학자들에게 의혹을 받았다. 교황청에는 드 뤼박이 감히 유일한 신학체계인 토미즘에 반기를 든 위험한 '새로운 신학'의 주창자라고 고발하는 건의서가 빗발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예수회 총장 신부는 드 뤼박에게 리용가톨릭대 교수직을 박탈하고, 그의 개인 서고를 폐쇄시켰다. 사람들은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이 당시의 위험한 사조들에 대해 경고했던 회칙 「인류」(Humani generis)가 드 뤼박을 위시한 새로운 신학을 펼치는 이들을 제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지성적 존재들을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나아가도록 질서를 부여하지 않고 창조하실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을 지복직관으로 부르시지 않고 창조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초자연적 질서의 진정한 무상성을 해치는 이들"이라고 한 부분이 드 뤼박을 겨냥한 것으로 봤지만, 이 문장은 놀랍게도 드 뤼박이 이미 1년 전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문 「초자연성의 신비」에서 썼던 그대로의 표현이다.

 인간이 초자연적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창조됐다는 드 뤼박의 주장에 근거해 그를 경고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한 번도 교황청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 회칙으로 경고나 제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드 뤼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사실 교황청이 아니라 예수회 총장에 의해, 그것도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내려진 예수회 내의 제재가 전부였다.

곽진상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1993년 사제수품(수원교구)
 ▲2005년 파리가톨릭대 기초신학 전공. 신학박사
 ▲2005~2006년 범계본당 주임
 ▲주요 논문 및 저서 : 「통교된 생명으로서의 신앙: 앙리 드 뤼박 안에 나타난 신앙내용과 신앙 행위의 관계」(파리, DDB, 2011), 「앙리 드 뤼박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인간이해」(2010), 「앙리 드 뤼박의 초자연 신학과 은총에 대한 비판적 이해」(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