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획특집

남북 빙하기에도 기도와 구호 활동으로 화해의 길 모색하다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19) 8·15 민족통일대회

2020.06.07발행 [1567호]

▲ 2002년 8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는 종교계를 비롯한 남북 민간 단체들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사진은 한반도가 새겨진 천을 들고 있는 남북 대표단.

▲ 장재언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와 악수하는 염수정 주교.

▲ 경기도 파주시에 자리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민족의 참다운 평화와 화해, 일치를 위한 기도와 미사 봉헌의 구심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과 내빈들이 2013년 6월 25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 봉헌식을 기념하는 축하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우리 서로 껴안고 하나가 되는 이 날을….”

2002년 8월 15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가톨릭을 비롯한 남북 종교계와 민간단체가 한자리에 모인 8·15 민족통일대회의 열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남측 참가자들은 서울을 찾은 116명의 북한 참가단과 6·15 공동선언 실천을 다짐하고 온 겨레가 화해와 신뢰, 단합의 손을 잡고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을 기원했다. 제2차 연평해전으로 남북에 사상자가 발생한 지 불과 40여 일. 경색될 수 있었던 남북 관계는 북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로 일단락되며 8·15 민족통일대회는 8월 14일부터 나흘간의 일정으로 무사히 개최될 수 있었다.



8·15 민족통일대회

“그간 많은 지원물자를 보내주신 한국 천주교회를 비롯한 남측 종교계에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북과 남의 감격적 상봉을 기뻐하며 동포애적 인사를 동포들에게 전합니다.”

2002년 8월 16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아트센터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종단별 부문 상봉 모임에 참석한 장재언(사무엘)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은 그동안 대북지원에 애를 쓴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하나의 민족, 같은 겨레로서 우리 모두의 마음과 마음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뜨겁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교회에서는 최덕기(수원교구장)·최기산(인천교구장)·염수정(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주교와 최창화(서울대교구 사무처장) 신부 등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20여 명이 참석했다. 최덕기 주교는 장 위원장에게 “앞으로도 북쪽 분들이 남쪽에 자유롭게 내려오고 남쪽에서도 북쪽으로 가서 친교를 돈독하게 하고 자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박 4일간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는 종교계 인사들을 필두로 한 민간 대표들이 체제와 이념을 초월해 화해와 통일의 염원을 공고히 다진 계기가 됐다. 그동안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중단하지 않고, 남북관계의 고비마다 용감하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온 것에 대한 작은 결실로도 풀이됐다.

민족 화해와 통일에 대한 열기는 이듬해 평양에서 ‘8·15 민족대회’가 열리며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측 대표단 341명을 태운 전세기가 2003년 8월 14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500여 명의 평양시민이 꽃술을 높이 흔들며 “우리는 하나다”, “조국 통일”,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를 외치며 환영했다. 가톨릭 대표단을 맞이한 장재언 위원장은 “찬미 예수”라는 인사말로 방문단을 환영했다. 한국전쟁으로 침묵의 교회가 된 북녘 땅에서 북측 인사의 “찬미 예수”라는 인사는 더욱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의 만남은 이듬해인 2004년 인천에서 열리며 최기산(인천교구장) 주교가 상임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남북은 만남을 지속하지 못했다. 2001년 금강산에서 처음 열린 남북 공동행사는 2007년까지 이어지다 남북관계 경색으로 2008년 중단됐다.



남북 관계 경색에도 이어진 대북 지원

2006년 10월 9일,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 긴장을 고조시킨 사건이 벌어진다. 북한이 함경북도 일원에서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그에 앞선 7월, 수 발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던 터라 그 여파는 심각했다. 1995년 북한의 수해 이후 한국 교회에서 추진해온 남북 화해 또한 벼랑 끝으로 몰렸다.

당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 김운회 주교와 정의평화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10월 13일 발표한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실천을 촉구하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이 땅에 참 평화를 일궈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같은 해 11월 북핵 문제로 인한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화해 줄 것을 호소했다.

북한은 핵실험 이후 국제 사회의 지원이 거의 끊기며 식량난이 가중됐다. 더욱이 성홍열과 장티푸스, 홍역, 수두 등 전염병이 창궐하며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2007년 국제 카리타스 대북 협상자 초청으로 북측을 방문해 평양인민 병원 등을 찾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북측이 좀처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대표적 취약계층 시설을 카리타스 대표단이 둘러볼 수 있게 했다”며 “드러내놓고 ‘도와 달라’,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 북측 사람들이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악으로 치달은 남북 관계에도 북녘 형제들에 대한 교회의 지원은 이어졌다. 2007년 국제 카리타스는 긴급구호에 머물러온 대북 나눔을 사회개발 지원 방식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8월 북한에 발생한 수해로 고통을 겪는 북녘 형제들을 돕고자 한국 교회 차원의 성금 모금과 기도운동이 펼쳐졌다.



다변화하는 민족화해 운동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교회의 대북 지원은 2009년 5월 25일 2차 북 핵실험으로 표류 상태에 빠진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천안함이 피격되어 침몰한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는 남북 교역 중단과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국민의 교역 중단을 단행했다. 같은 해 11월 23일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까지 벌어졌다.

갑갑한 노릇이었다. 북한은 가중되는 식량난에도 연이은 핵실험과 남측에 대한 도발로 고립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한국 교회의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퍼주기식 논란과 핵실험을 하는 북한을 왜 돕느냐는 비판에 부딪혔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민족 화해를 위한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운동을 펼치며 대북 지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행보를 보였다.

한국 카리타스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등은 의약품과 쌀, 밀가루 등을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 형제들에게 변함없이 지원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도 밀가루를 보내며 북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남북화해의 상징인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2013년 6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현지에서 봉헌됐다. 정진석 추기경은 이날 강론에서 “진정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려면 우리가 먼저 참회해야 한다”며 신자들의 기도를 당부했다. 한국 교회는 남북 빙하기가 계속되자 기도로, 교육으로, 북한이탈형제 돕기 사도직으로 남북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색된 남북관계는 쉽사리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