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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획특집

[주교님과 함께] 최재선 주교, "성직자와 수도자 생명은 기도와 가난 실천"

한국교회 최고령 성직자 최재선 주교, 주교수품 50돌 맞아

2007.10.28발행 [942호]

한국교회 최고령 성직자 최재선 주교, 주교수품 50돌 맞아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요한, 96) 주교는 한국교회 최고령 성직자다. 주교품을 받은 지 50년이 된다. 부산교구는 31일 교구 설정 50주년 감사미사에서 그의 주교수품 5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백수(白壽)를 내다보는 최 주교를 만났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한국외방선교회 수녀원.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더니, 수녀들이 "주교님이 조금 전까지 마당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하면서 여기저기 두리번 거렸다. 숙소에 내려가봐도 계시질 않았다.

 수녀 몇 명이 갑자기 사라진 최재선 주교의 행방을 찾느라 안팎을 바삐 오갔다.

 잠시 뒤 최 주교가 십자가의 길 14처를 빙 둘러 세운 잔디밭의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숨어(?) 기도하고 계셨다.
  
▲ 한국교회 최고령 성직자 최재선 주교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지만 총기만큼은 여전하다.
 
 최 주교 숙소는 수녀원 정문에 붙어 있는 안내실이다. 6.6㎡(2평) 남짓한 서재 겸 응접실, 변기 하나 달랑 있는 화장실, 30년 전 어느 목수가 짜줬다는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이 전부다. 책상이건 전등이건 모든 살림살이가 책장에 꽂혀 있는 서적들마냥 퇴색했다. 그 흔한 에어컨도 없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선풍기 한 대로 났다.

 "이 정도면 호강이지, 뭘 더 바라? 수녀원에 딸린 사제관은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필요한 사람 쓰라고 하고 난 이리로 내려왔어. 부자들이나 널찍한 거실에서 고급 소파에 몸 파묻고 사는 거지, 성직자는 그렇게 살면 안 돼.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해."

 낡은 책상 앞에 걸려 있는 작은 액자가 눈에 띈다. 사제들의 주보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1786~1859) 성화다.

 "비안네 신부님은 공부를 못해 신학교에서 쫓겨난 적이 있대. 머리가 아둔하셨던 것 같아. 그런 분이 성인이 되실 줄 누가 알았겠어. 나도 소신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공부 못하면 쫓겨났거든. 그때부터 비안네 성인한테 매달렸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야."

 최 주교는 1912년 경북 울주군에서 구교우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에 첫 영성체를 하고 나니까 부친이 "성모님 공경하면 은혜 받는다"며 까만 묵주를 쥐어줬다고 한다. 그 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친 묵주기도는 성직자, 특히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살아가는데 절대적 힘이 됐다. 요즘도 하루 평균 20단을 바친다.

 "주교품(1957년)을 받고 부산교구에 오니까 아무 것도 없더라구. 일제시대에는 일본 사람들 도시였고, 6ㆍ25전쟁이 나고는 피란민 도시가 되는 바람에 교세가 형편 없었어. 너무 막연한 거야. 그래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려고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혼자서는 하루 3꿰미(1꿰미는 5단)씩 1년 간 바쳐봐야 1000꿰미 조금 넘는 거야. 그래서 꾀를 내어 교구민들한테 같이 바치자고 했지."
 


 요즘 활성화 된 묵주기도 몇 십만 단, 몇 백만단 봉헌운동의 원조는 최 주교다. 그는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Ad Jesum per Mariam)' 가기 위해 로마에서 묵주 6만 개를 사서 배로 실어와 교구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교구장 재임 기간에 묵주기도의 은총을 톡톡히 체험했다. 교구장 시절을 회고하는 내내 "이게 성모님 기적이 아니고 뭐겠어?"라고 반문했다.

 "교구청도 없어서 중앙성당에서 더부살이를 했어. 당장 교구청 한 칸이라도 장만해야 겠는데 돈이 있어야지. 마침 메리놀회 수녀님들이 수녀원 부지(현 대청동 가톨릭센터)를 18만 달러에 팔려고 내놨다기에 달려가서 10만 달러에 달라고 했어. 대금은 연 1만 달러씩 10년에 걸쳐 갚겠다고 하고. 그런데 수녀님들이 미국 본부와 상의해야 할 문제라고 하기에 본부 총원장 수녀님한테 애원조로 장문의 편지를 썼어."

 몇 달 뒤 미국에서 "팔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거저 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최 주교는 쓸모 없이 방치된 부곡동 땅 56만1983㎡를 매입하기도 했다. 교구 신부들이 "돈도 없는데 그런 땅을 사서 뭐하냐"고 말렸지만 "교구가 100년, 1000년을 이어가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그 부지는 현재 부산가톨릭대ㆍ한국외방선교수녀원ㆍ지산고등학교ㆍ사회사목국 등이 들어선 가톨릭 벨트가 됐다.

 최 주교는 교구 기초를 놓을 종자돈을 구하느라 6개월 동안 미국 전역으로 모금하러 다닌 여행을 잊지 못한다. 미국 신자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주교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줬다.

 "덕분에 미국 구경은 실컷 하셨을 것 같다"고 하자 최 주교는 "마음이 편해야 구경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서툰 영어로 강론을 제대로 할까, 모금은 잘 될까 걱정하느라 아무 것도 못 봤어"라며 웃었다.
▲ 1950년대 후반, 부산교구에 물심양면 도움을 준 미국 신부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

 최 주교는 "하지만 아픈 매도 많이 맞았다"고 말했다. 교구에 분열이 일어나 착좌 15년(1973년)만에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 주교는 "모두 내 부덕의 소치다. 정당한 판단은 역사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는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외방선교회와 수녀회를 설립했다. 하느님과 서구교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나가 갚기 위해서였다. 한국외방선교회는 어느덧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한 한국 가톨릭의 얼굴이 됐다. 선교사제 30여 명이 파푸아뉴기니ㆍ타이완ㆍ모잠비크 등 6개국에서 한국 가톨릭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만큼 발전했으면 옛날에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갚을 생각을 해야지. 부산교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 교구들이 가난한 시절에 누구 도움 받아서 성당 짓고 하느님 사업을 했어? 이 시대에 가장 마땅한 하느님 사업은 외방선교야. 그래서 요즘 성모님께 돈 좀 달라고 떼를 쓰고 있어. 가난한 선교지에 달랑 사람만 보낼 수는 없잖아."

 그는 이따금 은행에 직접 가서 본보 어려운 이웃돕기 캠페인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에 성금도 부친다. 교구에서 나오는 생활비 씀씀이를 들여다보니까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돈은 거의 없다. 대부분 여기저기 후원금으로 보낸다. 그는 "교회와 하느님 영광을 위해 쓰는 거지, 이 늙은이가 돈 쓸 데가 어디 있어"라고 말했다.
 
 그는 절약하며 사는 게 몸에 뱄다. 여기저기서 날아온 우편물 서류 뒷장에 강론 원고를 쓴다. 휴지도 한 번 쓰면 버리지 않고 놔뒀다가 다시 쓴다. 한 번 쓰고 접어둔 휴지가 서랍과 책꽂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차는 '통일호'만 탔다.

 "모든 게 풍족한 세상이니까 너무 아끼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게 다 누구 돈이야? 결국 신자들이 피땀흘려 번 돈이잖아. 그런 돈을 낭비하면 벌 받아. 성직자가 편하고 호화롭게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기도를 안 해. 기도를. 성직자와 수도자의 생명은 '기도'인데 점점 기도생활을 안해서 걱정이야."

 말이 나온 김에, 최고(最古) 원로로서 후배 사제들에게 회초리 들어 꾸짖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신부들이 말과 계획만 무성하고 실천을 하지 않아. 그러니까 책을 내도 말잔치로 끝나는 게 많아. 교회가 발전하려먼 신부들이 먼저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해. 순교자들 덕으로 쌓은 잠재력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아. 그걸 끄집어내려면 말보다 실천을 해야 해."

 그는 "돌이켜 보면 성모님 은혜로 살았다"며 "그래서 100년, 1000년 동안 하느님과 성모님 앞에 무릎끓고 감사기도를 드려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