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노르웨이식 평화와 한국식 평화(김태균, 그레고리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0. 01. 05발행 [1546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칼 포퍼는 독일 나치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그의 역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서구의 대표적 정치 철학자였던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에 부역한 이론가로,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라는 ‘열린 사회’의 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기존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열린 사회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연시했던 많은 사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통치 권력과 지식 권력, 그리고 산업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어, 결국 우리의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소통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결과물만이 ‘사회적 사실’로 인정돼야 하며, 사회 내부에서 주창되지 않은 채 외부에서 여과 없이 도입된 사실은 열린 사회의 적으로 바뀔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사회 내부에서 구성된 사회적 사실로서의 평화가 얼마만큼 그 사회에 내재화되고 시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는가에 따라 평화가 진정한 우군이 되고 평화가 지속 가능한 정책의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평화의 내재화 정도는 노르웨이식 평화와 한국식 평화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중요한 척도다.

‘평화 국가’ 또는 ‘평화 외교’와 같은 수식어가 자연스러운 노르웨이는, 국제 사회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대표 국가다. 이처럼 노르웨이가 국제 사회에서 평화 국가로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복지 국가’, ‘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중립국’을 노르웨이 국내 정치와 시민 사회 내부에서 치열한 협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 사실로 합의되었다는 데 있다. 외부로만 평화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주인인 시민들이 내부적으로 평화의 가치를 존중하고 평화의 기조하에 외교 정책 추진하는 것을 지지하기 때문에 평화를 국내 공공 정책과 외교 정책의 토대로 통합하는 효과성을 창출하게 된다.

한국식 평화는 이와 반대 국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평화는 외세에 의해 강제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질적인 존재와 상존한다는 구조적 조건 때문에 평화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뿐이지, 평화가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심지어 사회의 주류인 보수 진영은 국내에서 평화를 주도적으로 논하고 담론화하려는 시민 사회의 노력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볼 정도로 아직 국내 수준에서 평화 담론이 정착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 스스로 평화 담론을 한반도에 정착시키고, 국내의 공공 정책과 대북 정책, 글로벌 공공재 제공에까지 국내외의 평화 정책이 일관되게 연계되지 않으면, 우리가 평화 외교를 강조하며 주변 강대국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야기해도 별다른 설득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1904년 독립할 당시만 해도 외교 정책을 꾸릴만한 힘이 없는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사회의 평화 담론과 정책을 선도하는 평화 국가의 모범국이 됐다. 한국도 민주화의 경험과 분단 체제를 극복하려는 평화 운동의 역사적 경로를 토대로 먼저 평화 담론을 한국 사회 내부에서 공론화해야 한국식 평화의 모델을 평화 외교로 구체화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먼저 평화 국가로 재탄생할 때, 주변 4강은 물론 국제 사회에 한반도 평화의 로드맵을 선도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외부에서 주어진 평화 담론과 해법은 한국이라는 열린 사회에게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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